리젠트 파크(Regent’s Park)는 런던 북부의 도시 조직을 정교하게 수놓는 거대한 원형의 녹지이며, 19세기 초 존 내쉬(John Nash)가 주도한 계획도시 구상의 심장부다. 하이드 파크가 ‘열린 초원’의 자유를 상징한다면, 리젠트 파크는 ‘정밀하게 설계된 일상’의 미학을 증명한다. 외곽을 따라 흐르는 리젠트 스트리트의 축선, 공원을 감싸 도는 아우터 서클(Outer Circle)과 이너 서클(Inner Circle),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배치된 정원·호수·주거군은 도시·자연·거주가 유기적으로 얽히는 방식을 보여준다. 장미의 향이 계절을 매만지는 퀸 메리 로즈 가든, 교육과 연구를 품은 런던 동물원, 여름밤 드라마를 만드는 오픈 에어 씨어터까지—이곳은 계획과 삶이 공존하는 ‘살아 있는 도면’이다.
설계 철학과 도시적 의미
리젠트 파크의 뿌리는 섭정(Prince Regent, 훗날 조지 4세)의 후원을 받은 존 내쉬의 장기 프로젝트에 있다. 내쉬는 도시의 북쪽 개발을 견인하기 위해 ‘왕실-도심-주거’를 하나의 시나리오로 엮었다. 그는 버킹엄궁으로부터 시작되는 왕실의 상징축을 도심 상업의 동맥인 리젠트 스트리트로 연결하고, 다시 북쪽의 대규모 공원으로 상승시키는 도시적 장면 전환(sequence)을 설계했다. 공원은 그 시퀀스의 클라이맥스로서, 귀족적 주거군(테라스 하우스와 빌라)과 공공의 여가공간을 맞물리게 했다. 이 결합 방식은 ‘사적 가치의 격(格)과 공공적 사용의 개방성’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도시 전략이었다.
공간 언어로 보면, 리젠트 파크는 두 개의 원형 서클(Outer/Inner Circle)로 규정된다. 외곽의 원은 도시 교통을 수용하며 공원의 경계를 선명하게 그린다. 내부의 원은 정원적 프로그램—로즈 가든, 보트 레이크, 잔디광장—을 느슨하게 품어 ‘생활의 리듬’을 만든다. 원과 축, 직선과 곡선의 대비는 르네상스의 규칙성과 영국식 풍경정원의 자유로움을 한 화면에 공존시킨다. 내쉬는 이 구조 위에 ‘주거의 프레임’을 얹었다. 공원 외주를 따라 늘어선 파크 크레센트·파크 스퀘어·파크 빌리지의 연속은 풍경을 향해 열린 파사드(정면)와 공공의 녹지를 같은 축에 올려놓는 장치다. 결과적으로 공원은 ‘뒤편의 정원’이 아니라 ‘전면의 도시 무대’가 된다.
사회적 함의도 분명하다. 19세기 런던은 산업자본주의의 성장 속에서 위생·주거·교통 문제로 흔들렸다. 리젠트 파크는 상류 주거의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광대한 녹지를 ‘도시의 공공 자산’으로 제공했다. 귀족적 테라스가 프레임을 만들고, 그 프레임 안에서 시민과 방문자가 풍경을 공동 향유하는 구조다. ‘계급의 경계’ 대신 ‘풍경의 공유’를 매개로 한 이 설계 철학은 오늘날의 공공 공간 정책—워터프런트 공유, 조망권의 공공성, 공원 가장자리의 활성화—로 계승된다.
공간 구성과 프로그램
리젠트 파크의 공간 구성은 ‘정밀한 골격’ 위에 ‘느슨한 생활’을 얹는 방식이다. 외곽의 아우터 서클은 조깅·사이클링·차량 흐름을 수용하는 경계 장치이면서, 공원을 한 바퀴 감아 도는 순환 경관의 프롬나드다. 이너 서클 내부로 들어가면, 톤이 완전히 달라진다. 퀸 메리 로즈 가든은 400종 이상의 장미 컬렉션을 중심으로 구획된 정원실(room)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계절마다 다른 색·향·질감을 제공한다. 장미 사이의 보더 식재는 피크 시즌의 스펙터클뿐 아니라 비수기의 골격(상록·구조)을 고려해 설계되어, 1년 내내 ‘볼거리의 공백’을 줄인다.
로즈 가든 북서쪽의 보트 레이크는 잔잔한 수면과 수변 산책로, 보트하우스·카페가 결합된 복합공간이다. 물은 공원의 중심을 느슨하게 분절하며, 시각적 깊이를 만든다. 물가에서 잔디로, 잔디에서 수목 그늘로 이어지는 그라데이션은 이용자를 자연스럽게 체류하게 한다. 동쪽으로 이동하면 런던 동물원(ZSL London Zoo)과 맞닿는다. 1828년 문을 연 이곳은 ‘전시’보다 ‘연구·교육’ 기능을 강조한 세계 최초의 과학적 동물원으로, 공원이 단순한 경관을 넘어 지식·보전의 플랫폼으로 확장되는 방식을 상징한다.
여름이면 오픈 에어 씨어터(Open Air Theatre)가 서사적 무대를 연다. 수목 캐노피가 만들어내는 자연형 객석과 무대는 도시 가운데서도 ‘야외극’의 몰입감을 최대화한다. 셰익스피어에서 현대극까지, 시즌별 큐레이션은 공원을 ‘야간 문화 인프라’로 변모시킨다. 남측 잔디광장과 스포츠 필드는 낮에는 피크닉·크리켓·풋볼로 채워지고, 주말 행사와 마켓이 열리면 공공 수요에 맞춰 즉흥적 프로그램을 수용한다. 북쪽의 프림로즈 힐(Primrose Hill)
운영 관점에서 눈에 띄는 점은 미세한 관리의 층위다. 장미·관목·초화의 개화 달력, 수목의 가지치기 주기, 잔디의 사용 강도에 따른 로테이션, 물순환과 배수 관리(SuDS 개념의 적용), 야간 조도의 층별 계획까지— ‘정원적 디테일’과 ‘도시적 유지관리’가 한 화면 안에서 합치된다. 이 정교함이 리젠트 파크의 일관된 품질을 지탱한다.
시사점
첫째, 엣지(Edge) 전략. 공원의 가치는 중심부만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결정된다. 리젠트 파크는 주거·상업·교통이 만나는 엣지를 정교하게 설계하여, ‘풍경을 향한 건축’과 ‘공원을 향한 도시’가 서로의 면을 구성하게 했다. 국내 도시공원에서도 가장자리의 활성화—저층 커뮤니티 시설, 공공테라스, 보행친화 입면—가 핵심 전략이 되어야 한다.
둘째, 다기능 플랫폼. 로즈 가든(정원문화), 동물원(교육·연구), 오픈 에어 씨어터(야간문화), 스포츠 필드(생활체육)가 상호 간섭 없이 공존한다. 프로그램의 이질성은 동선의 분리·시간표의 조정·음향 경계의 설정을 통해 조율된다. 공원은 단일한 정체성을 고집하기보다, ‘다층의 정체성’을 운용하는 플랫폼이어야 한다.
셋째, 운영의 프로토콜. 리젠트 파크는 디자인만큼 운영·유지의 표준이 촘촘하다. 계절별 화훼의 교체, 관수와 배수의 균형, 행사·행위 규정의 명확화가 사용자 만족을 견인한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운영 시나리오(행사 캘린더, 유지 인력·장비, 예산 라인)를 도면화하는 관행이 국내에도 필요하다.
넷째, 자연·교육·문화의 삼각편대. 기후위기 대응(그린 인프라), 시민학습(동물원·해설 프로그램), 야간문화(오픈 에어 씨어터)가 결합할 때 공원은 ‘하루 24시간, 사계절’ 작동한다. 리젠트 파크의 모델은 대형 공원뿐 아니라, 도심 소공원의 네트워크에도 축소 적용 가능하다.
스토리텔링과 문화적 상징성
빅토리아 후기의 산책 문화는 리젠트 파크를 ‘사회적 무대’로 만들었다. 테라스 하우스의 연속적 입면은 귀족적 생활을 배경으로 삼았고, 잔디와 산책로는 계절마다 ‘공공의 사롱(salon)’으로 변했다. 이 장면은 회화와 문학에 반복적으로 포착된다. 현대에 들어서도 공원은 ‘예술의 현장’으로 진화한다. 여름마다 열리는 오픈 에어 씨어터는 수목 캐노피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드라마의 몰입감을 런던 시민의 기억에 각인시키고, 공원 남쪽 일대에서 열리는 조각·아트 페어는 풍경과 예술의 간극을 최소화한다. 도시는 공원을 ‘전시장의 벽’ 없이 예술을 경험하는 장으로 재해석한다.
리젠트 파크의 상징성은 ‘정밀함’과 ‘여유’의 공존에 있다. 도시계획의 수학적 정확성—원·축·대칭—과 일상의 느슨함—피크닉·보트·공연—이 같은 화면 안에서 모순 없이 어울린다. 시민은 도면의 선과 꽃잎의 결을 동시에 체험한다. 그래서 이 공원은 지도에서 볼 때도 아름답고, 걸을 때는 더 설득력 있다.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결국 경험이다. 리젠트 파크는 ‘보는 도시’에서 ‘사는 도시’로 이행하는 런던의 변화를, 풍경 언어로 체화한 상징적 무대다.
리젠트 파크 — 핵심정보
- 국가/도시: 영국 런던
- 면적: 약 166ha
- 설계: 존 내쉬(John Nash) 중심의 리전시 시대 계획
- 공간 골격: Outer/Inner Circle, 정원실(Room), 보트 레이크
- 대표 프로그램: 퀸 메리 로즈 가든, 런던 동물원, 오픈 에어 씨어터, 스포츠 필드
- 운영 주체: The Royal Parks

